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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1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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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베리아 원정 === 1617년부터 궁정은 왕태자와 [[이베리아]] 왕녀의 혼담을 추진했다. 지참금으로 전비를 충당하고 이베리아를 중립화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베리아는 왕태자의 가톨릭 개종과 루이나 내 가톨릭 관용을 요구하며 협상을 끌었고, 4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었다. 1621년 봄, 카렐과 렌포드 공작은 부왕에게 알리지 않고 벨포르를 떠났다. 가짜 수염을 붙이고 형제 상인 행세를 하며 대륙을 가로질러 이베리아 궁정에 직접 나타났다. 왕태자가 몸소 구혼하면 상대가 차마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이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베리아는 협상 카드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판단하고 조건을 더 올렸다. 왕태자는 여덟 달 동안 이베리아 궁정에 사실상 붙들려 있었다. 왕녀와 제대로 대면한 적도 없었다. 정원 담 너머로 그를 훔쳐보다 들켰다는 일화가 전하는데, 사실 여부와 별개로 그가 처한 위치를 잘 보여 준다는 이유로 자주 인용된다. 두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루이나에서는 왕태자가 가톨릭 왕국의 혼담을 걷어차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항구에는 군중이 몰렸고 도시마다 종이 울렸으며 축포가 올랐다. 카렐이 생애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여덟 달은 그에게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이베리아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다른 하나는 더 오래 갔다. 협상이란 상대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며, 한 번 물러서면 요구는 반드시 늘어난다는 확신이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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